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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

[철학자습] 보편논쟁으로 훑어보는 중세

Pixabay 로부터 입수된  ddzphoto 님의 이미지 입니다.

중세시대에 보편논쟁이라는 게 있었다. 보편자가 있느냐 없느냐의 물음에서 촉발된 논쟁이었다. 보편자란 고유명사를 아우르는 집합명사처럼 개별체들을 공통의 특성으로 묶는 상위 개념이다. 예를 들어 김철수와 이영희라는 사람이 있을 때 김철수와 이영희는 개별자, 사람은 보편자가 되는 식이다. 이 보편자의 개념에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은 3세기 그리스 철학자인 포르피리오스였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중 범주론을 정리하다가 세 가지 의문을 품었다. 하나, 유와 종은 실재인가, 아니면 관념인가. 둘, 실재라면 물체인가, 비()물체인가. 셋, 실재라면 감각적 대상 밖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안에 존재하는가. 포르피리오스는 끝내 답을 내지 못했다. "당분간 나는 당연히 속과 종에 대해서, 그것들이 기본적이고 순수하게 고립된 개념인지, 만약 그렇다면 그것들이 형체가 있는지 없는지, 또는 그것들이 분리된 즉 느낄 수 있는 대상인지 아닌지, 그리고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매우 심오하며 더 광범위한 조사가 필요하다."며 결론을 유보한 것이다.

 

이 보편논쟁은 잠시 잊히는 듯하다가 약 이백 년 후에 최후의 로마인이자 최초의 스콜라학자였던 보에티우스가 포르피리오스의 <범주론 서설>을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다시 논란이 되었다. 보편자 문제가 논쟁이 되는 건 단순히 보편자의 유무나 보편자와 개별자의 우열보다는 보편자가 함의하고 있는 종교·정치적 문제 때문이었다. 보편자를 인정하느냐 마느냐에 기독교 신앙과 원죄론, 삼위일체, 그리고 로마교황청의 권력까지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 그리고 교회와 권력을 나눠가진 기득권에서는 '보편자가 실재하고, 보편자는 사물(개별자)에 앞선다'고 주장해야만 했다. 이들의 주장을 실재론이라고 하는데, 유물론적 실재론과는 다른 개념적 실재론, 즉 관념론이다. 보편논쟁의 개념 실재론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데아론은 플로티누스의 일자론을 거쳐 아우구스티누스에서 기독교 사상으로 발전하는데, 이 과정에서 이데아는 일자 The one이 되고 일자는 다시 신으로 승화하게 된다. 신이 인류라는 집합의 상위 존재라는 점에서 보편자는 신과 같은 개념을 공유한다. 즉 신을 믿는 건 곧 보편자를 인정하는 것이다.

 

'보편은 실재이고, 보편자는 개별자에 앞선다'는 실재론에 이견이 생긴 건, 그리스에서 유실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이 이슬람권에서 분리 발전하다가 이슬람 문화의 유입으로 유럽으로 다시 들어오면부터다. 아리스토텔레서는 스승인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받아들이면서도 지각할 수 없는 먼 이상의 세계가 아니라 발 딛고 있는 현실 세계를 더 중요하게 여겼으며, 인간의 지성과 이성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이어받은 후대 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인정하면서도 긍정하지 않았듯이, 실재론을 인정하면서도 완전히 긍정하진 않았다. 그들은 '보편자는 실재하지만, 보편은 사물 안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을 온건 실재론이라고 하며, 아벨라르두스가 대표적인 온건 실재론자이다. 플라톤 - 플로티누스 -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치며 발전된 실재론은 9세기의 에리우게나, 11세기 켄터베리의 안셀무스, 그리고 샹포의 기욤 등으로 이어지는데, 실재론과 온건 실재론은 완전히 대립되는 입장이라기보다는 다른 온도를 가진 비슷한 주장이었기에 험악한 논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11세기 들어 상업이 발달하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지방에 교회들이 많아짐에 따라 보편논쟁은 재점화되는 양상을 띄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보편자(인간의 대표)이신데, 왜 로마 교회만이 보편(대표) 교회가 될 수 있는가, 개별 교회도 보편 교회일 수 있다고 지방 교회들은 주장했다. 로마 교회에서는 이들의 주장을 부정할 수만도 없었다. 보편자의 보편성을 부정하는 건 곧 하느님을 부정하는 거고, 실재론을 부정하면 실재론이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던 원죄론과 구원론 삼위일체 사상이 죄다 흔들리기 때문이다. 보편 인간인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어 개별 인류에게 원죄가 있다는 원죄론, 보편자인 예수가 원죄를 대신 짊어져 개별 인류가 구원받았다는 구원론, 성부 성자 성령은 보편자인 하느님의 개별자라는 삼위일체 사상은 보편자의 전제 없이는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렇게 단순히 보편자의 유무를 떠나, 보편논쟁은 종교·정치 권력의 문제로 비화되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러다 11세기 경 실재론과 온건 실재론을 완전히 부정하는 제 삼의 주장, 유명론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을 처음 제시한 사람은 프랑스의 스콜라 철학자인 로스켈리누스였다. 그는 보편자라는 전제 자체를 부정했다. 보편자 같은 건 없다. 그것은 단지 이름이고 소리의 떨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보편은 명칭이고, 보편은 사물 다음에 존재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로스켈리누스의 유명론을 이어받은 14세기 윌리엄 오컴은 '정신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일반적 진리나 사상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것들은 사물에 대한 관찰의 결과로서 정신이 발달시킨 공통적 특성을 지는 주관적 사상일 뿐이며, 보편 개념이나 일반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낸 명칭일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유명론자들은 '보편자'보다는 개별적인 존재와 사물에 관심을 두고 정신이 인지할 수 있는 유일한 실체는 감각에 의해 체험되는 구체적인 개개의 사물일 뿐이라는 경험론적 인식론을 지지했다. 유명론자들의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던 중세시대에는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실제로 이들은 기독교의 교리를 거부하고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휴머니즘으로, 천상에서 지상의 사물 중심의 자연주의로 사상을 발전시켰다. 신학과 철학의 분리를 시도한 것이다.

 

이렇듯 보편논쟁은 단지 하나의 논쟁이 아니라 고대 철학에서 중세 철학으로의 이동과 당시의 정치 상황, 그리고 기독교의 흥망성쇄를 담고 있는 약 천 년 동안의 논쟁사이다. 플라톤에서 시작된 이데아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다른 노선을 밟았고 두 노선은 각각 실재론과 유명론이라는 갈래를 만들어 냈다. 실재론을 받아들인 기독교의 흥망성쇠와 함께 실재론도 약화되었다. 반면 유명론은 종교의 시대로 대변되는 중세 말기에 개별자인 사람과 이성을 강조하는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시대를 열었다. 이는 탈레스에서 시작된 탈레스에서 로고스의 세계로의 이행의 거대한 쉼표이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완전한 결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