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근대 철학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구도이다. 합리론은 인간의 이성을 지식의 제일 근원으로 보는 견해를 말한다. 합리론에서의 진리의 기준은 감각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연역적인 방법론이나 이론으로 정의된다. 철학사에서 합리론은 데카르트에서 출발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로 이어진다. 경험론은 감각의 경험을 통해 얻은 증거들로부터 비롯된 지식을 강조하는 이론이다. 관념의 형성과정에서 생득관념이나 관습보다는 경험과 증거, 감각에 의한 지각을 강조한다. 인식의 원천을 오직 이성으로만 추구하는 합리론과 대립하는 방법론인 경험론은 로크에게서 버클리 흄으로 이어진다. 중세 말부터 근대 이전까지 첨예하게 대립한 합리론과 경험론은 칸트에게서 합쳐져 헤겔로 이어진다.
근대 철학의 아버지로 평가받는 데카르트는 합리론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의 유년은 행복하지 않았다. 첫 돌이 조금 지났을 때 어머니를 여의서였을까. 데카르트는 몸이 허약했고 성격도 내성적이었다. 스스로를 아버지가 가장 싫어했던 아들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로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며 자랐고 형제들과도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 삭막한 환경에서 어린 데카르트는 자연과 사물에서 위안을 얻었던 듯하다. 홀로 자연 속에 앉아 공상하는 걸 즐겼으며 주변의 사물에 호기심과 애착을 느꼈다. 학자의 기질이 만들어진 것이다.
데카르트는 여덞 살에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해 라틴어, 수사학, 고전 문학, 변증론, 자연철학, 형이상학, 윤리학 등을 배웠다. 영민하고 성실하고 수학에 큰 재능이 있다는 게 데카르트를 가르쳤던 선생님의 평가였다. 이때의 배움은 훗날 그가 저작 활동을 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그에겐 반골기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예수회 학교의 구시대적인 교육 방식에 큰 불만을 가졌고, 학교의 교과서들을 지식 쓰레기라며 강하게 비난했다. 중고등 과정 학교를 졸업한 데카르트는 열여덞에 파리로 갔다. 푸아티에 대학에 법학과에 입학했다. 거기서 수학, 자연 과학, 법률학, 스콜라 철학 등을 배우는데, 이때 수학만이 명징학 학문이라는 생각이 확실하게 자리 잡았다.
데카르트는 학문 중에서 수학만이 확실한 것으로 여겼다. 철학도 수학처럼 명확히 드러나는 진리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으려 했다. 그 방법은 진리가 아닌 것들을 소거하는 소거법이었다. 진리를 찾아가는 방법론은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 잘 나타나 있다. 대표적 합리론자였던 데카르트는 사람의 감각도 불확실한 것으로 보았다. 감각은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이 확신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경험에서 비롯했다. 어느 날 데카르트는 자신에게 이상한 성향이 있음을 깨달았다. 사시를 가진 이성에게 더 호감을 느끼고 호의를 베푼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이다. 왜 그럴까 숙고한 끝에 어릴 적 좋아한 소녀가 사시였음을 깨달았다. 소녀를 사랑한 데카르트에게 소녀의 결점은 문제가 아니었다. 사랑의 감정이 그녀의 신체적 결점을 압도했던 것이다. 그 유년의 경험이 무의식에 남아 훗날까지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에 데카르트는 경험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무의식에 남은 과거의 경험과 감정, 감각이 객관적인 판단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깨우쳤다. 보고 느끼는 세계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 데카르트가 도달한 결론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였다. 내가 모든 것을 의심할 때, 내가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임을 데카르트는 인식했다. 데카르트적 회의론의 탄생이었다. "악마가 인간을 속이려 해도, 생각하는 인간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 명제는 근대 철학을 대표한다. 데카르트 이후의 철학은 이 명제의 절대적 영향력 속에 있었다. 특히 데카르트가 사용한 '관념'이라는 개념은 칸트에게까지 영향을 주었다.
데카르트의 가장 유명한 이론은 심신 이원론이다. 이원론은 세계를 두 개의 대립 요소로 보는 입장을 말한다. 플라톤은 세계를 이데아와 현실 세계로, 조로아스터교는 세계를 선과 악으로, 칸트는 현상계와 물자체로, 동양의 주역은 양효와 음효로 보았다. 데카르트는 실체를 증명하기 위한 존재론으로 심신 이원론을 주장하는데, 철학에서의 실체란 타자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무엇을 의미한다. 그는 현실의 사물을 모두 피조물로 보았다. 오직 신만이 실체였다. 이 전제를 위해 데카르트는 존재론적 신 존재 증명을 했다. 그에 따르면 신은 개념적으로 전지·전능·전선한 존재자이다. 이 완전한 존재자는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데카르트는 부재를 불완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데카르트는 온전히 스스로 존재하는 신을 무한실체로 정의하고, 신에게는 의존하지만 다른 어떤 것에는 의존하지 않는 존재를 유한실체로 정의했다. 그리고 유한실체를 다시 물질과 정신으로 분류했다.
물질 |
정신 |
몸 |
마음 |
두뇌 |
생각 |
신(body) |
심(mind) |
데카르트는 물질과 정신을 분리하며 각각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물질의 본성 = 연장(공간을 점유한다는 의미)을 가졌다. 깊이와 넓이가 있다.
정신의 본성 = 연장이 없다. 공간을 점유하지 않는다. 정신의 본성은 사유한다는 것.
데카르트에게 인간은 물질과 정신, 몸과 마음이 결합된 존재이다. 물리 법칙을 따르는 기계론적인 존재이자 자유의지를 가진 영적인 존재였다. 물질과 정신이 각각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생각은 그 당시로는 기발한 발상이었다. 데카르트가 활동하던 당시는 과학혁명의 시기였다. 그러나 당시 과학자들은 지금처럼 가운을 입고, 실험을 하고, 방정식을 푸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가에 가까웠다. 당시 과학자들은 로마 교회의 탄압으로부터 자신들의 사상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가령 태양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는 천동설 지지했던 로마 교회는 천동설을 반대하는 학자들을 권위와 폭력으로 탄압했다. 기독교인들에게 천동설은 양보할 수 없는 믿음이었다. 천동설이 전제돼야 우주의 중심이 지구이고, 지구의 중심이 로마이며, 로마의 중심이 바티칸이고, 바티칸의 중심이 교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의 책 서문에다가 "지동설은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는 단서를 달아야 했으며, 지동설을 주장하던 갈릴래오는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결국 자신의 주장을 철회해야 했다. 우주가 무한하다고 주장한 부루노는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아서 화형에 처해졌다.
데카르트의 심신 이원론은 이러한 위기에서 과학자들을 구하려 한 기획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데카르트가 물질과 정신의 영역을 각각 구분함으로써 철학과 신학은 정신의 영역에 남고 과학은 물질의 영역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철학과 과학은 각자의 영역에 남겨진 실체에 대한 권한을 부여받고 잠정적인 휴전에 돌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과학자들은 더는 화형대에 오르지 않을 수 있었고 종교재판에도 회부되지 않았다. 과학자들이 물질로서의 인간을 탐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는 근대의 기계론적인 세계관의 탄생이었다. 인간을 기계처럼 연구해도 신학이나 철학과 충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지금도 우리는 데카르트가 설정한 구도에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철학과 과학이 분리된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그 증거이다.
심신 이원론을 향한 반론도 많았다. 연장이 없는 정신이 어떻게 연장이 있는 물질을 움직이는가 하는 질문도 그중 하나였다. 이 문제의식에 대해 데카르트는 두뇌의 한 부분인 '송과선'을 물질과 정신이 따로 만나는 공간으로 가정했다. 몸에 물리적 자극을 가하면 자극은 송과선으로 올라와 마음으로 전달되고,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이 송과선을 통해 몸에 전달된다는 가설이었다. 이밖에도 심신 이원론에 대한 반론들이 존재했다. 물질이 정신에 영향을 미치며, 마음은 물질의 부수 현상일 뿐이라는 헉슬리 부수 현상론(EPIPHENOMENALISM).물질만이 존재한다는 유물론 (MATERIALISM). 존재하는 것은 정신뿐이라는 관념론 (IEALISM). 실체는 사실 하나인데, 그것이 물질이나 정신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스피노자의 병행론 (PARALLELISM). 신을 매개로 정신과 물질이 연결되어 있다는 기회 원인론 (OCCASIONALISM). 물질과 정신의 움직임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라이프니츠 예정 조화설 (PRE-ESTABLISHED HARMONY) 등이 심신 이원론에서 파생된 반론들이다.
여러 반론들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가 근대 사상의 기틀을 확립했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이원론을 통해 과학적 자연관과 정신적 형이상학의 연결을 시도하며 세계를 몰가치하고 합리적으로 보는 태도와 정신의 내면성 강조하는 유럽 철학의 합리주의의 근간인 회의론을 완성했다. "의심이 가능한 모든 믿음을 제외함으로써 기본적인 신념만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선언은 너무나 유명하다. 데카르트는 수학만이 명징한 언어라는 기본적인 신념으로 철학을 비롯한 모든 학문의 수학적 해석을 시도했다. 세계의 근원과 진리를 찾으려는 그의 노력은 철학이나 수학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에서도 결코 작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스텔의 법칙으로 알려진 빛 굴절의 법칙 발견했으며. 직교 좌표 발명해 해석 기하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현대 수학의 방정식 미지수에 사용되는 기호 x 또한 데카르트가 최초로 도입했으며 거듭제곱을 표현하기 위한 지수도 개발했다. 기하학과 대수학의 결합으로 두 학문을 하나의 학문으로 합치하는 데 성공했으며 한 발 더 나아가 모든 학문을 하나의 방법론으로 통합하려는 애썼다. 모든 문제는 동일하고 보편적인 '수학적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데카르트는 이 방법론을 '보편 수학'이라 명명했다. 그러나 세상의 철학적 진술은 비수학적이었다. 철학의 기초 확립을 위해 모든 것을 의심했다. 참이 아닌 것들을 소거하는 소거법으로 근본에 다가갔다. 이로써 그는 근대 철학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 토대 위에 당대의 기독교 사상과 스콜라 철학과 분리된 새로운 철학의 세계가 세워졌다.
이렇듯 데카르트는 고대 그리스 철학을 집대성한 철학자였을 뿐만 아니라 여러 상황에 모두 쓰일 수 있는 '보편 수학'을 창시한 혁명적 수학자였다. '보편 수학'은 그의 예견대로 광학, 천문학, 기상학, 음향학, 화학, 건축한, 물리학, 회계 등에 응용되었으며, 본인이 예견하지 못했던 전기학, 인공두뇌학, 미생물학, 유전학, 경제학 등에서도 응용되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이 절대 진리를 이용해 구성요소의 진리 값으로 다른 진술을 증명하는 법을 개발한 데카르트. 그의 글과 벙법론을 의미하는 '데카르트적 회의'는 서양 철학의 특징이 되었다.
데카르트의 명성은 대륙 전체로 뻗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명세는 단명의 불씨가 되었다. 1649년 2월 월 데카르트의 명성을 들은 스웨덴 여왕이 그를 초대한다. 여왕은 일주일 세 번의 새벽 강의를 명했다. 늦게 일어나는 성향이 있었던 데카르트에게 여왕을 강의하는 스케줄은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북유럽의 겨울은 그에게 혹독했다. 결국 1년을 견디지 못하고 과로와 폐렴으로 1650년 2월 11일 스톡홀름에서 운명했다. 데카르트의 유골은 17년이나 지나서야 프랑스 돌아와 성당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132년 후인 1799년 프랑스 정부가 그의 유해를 프랑스 역사관으로 이관해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과 함께 안치했다. 그로부터 다시 20년 후인 1819년 다시 생 제르맹 대프레 성당에 영치된다. 그의 묘비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데카르트, 르네상스 이후 인류를 위해 처음으로 이성의 권리를 쟁취하고 확보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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