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대상이 생기면 그 대상을 알고 싶어한다. 그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가 살아온 배경과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등이 알고 싶어진다. 사물이라면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활용하면서 더 오래 보존할 수 있는지 등을 찾아보게 된다.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공통된 마음은 대상을 아끼려는 마음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바로 사랑일 것이다.
사람은 보통 사람이나 사물, 혹은 둘 다를 사랑하지만 여기 수를 너무나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바로 독일의 수학자 고틀로프 프레게이다. 그는 수를 너무나 사랑해서 수의 본성을 연구하고 수를 경험의 학문이 아닌, 확실한 언어의 지위로 올려놓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보통 수학을 객관적인 언어로 생각한다. 근대 철학의 지성인 데카르트도 새로운 철학의 기초를 세울 언어로 수학을 지목했었다. 그 만큼 수학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이고 확실한 언어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프레게는 수학 또한 경험의 학문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1+1=2 라는 간단한 수식조차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 돌멩이 하나에 다른 돌멩이를 얹으면 둘이 된다는 선경험의 결과값이며, 나아가 복잡한 수식도 마찬가지는 게 프레게의 생각이었다.
수학을 논리학처럼 확실한 학문으로 승화하고 싶었던 그의 고민과 연구는 <개념표기법>의 출판으로 이어진다. 프레게의 나이 서른 한 살의 일이다. 수를 논리학처럼 보편타당한 학문의 지위로 올려놓고자 한 원대한 꿈의 결과물인 이 저서에세 프레게는 논리학의 새로운 계산과 이에 필요한 기호체계를 제시했다. 이는 논리학의 역사를 바꿀 만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당대 학계는 <개념표기법>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의 첫 저작은 강사에서 교수로 승진하는 데 도움을 준 것 외에는 아무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개념표기법>의 흥행 실패에도 불구하고 프레게는 연구를 계속하여 약 5년 후인 1884년 <산수의 기초>를 출판한다. 이 책에서 프레게는 전작에 대한 비판들을 반박했으며, 논리주의로 알려진 산수도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주장을 처음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 책 역시 전작처럼 학계와 세간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묻히고 만다. 무관심이 어느 정도였냐면 그의 책에 달린 서평은 고작 3개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모두 비판일색이었으며 이후로도 20년 가까이 학계는 그를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에 미치면 세간의 무관심에도 무심해지는 법. 프레게는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하였고 약 8년 후인 1892년 그의 저작 중 가장 중요한 논문 중 하나로 평가받는 <뜻과 지사체에 관하여>를 발표한다.
수를 너무도 사랑한 프레게는 평생 동안 수를 연구했으며 그와 관련된 논문과 저서들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가 살아 있는 동안 프레게가 일군 연구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는 사람은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이탈리아의 수학자 주세페 페아노, 영국의 수학자 버트런드 러셀, 비트겐슈타인, 프레게의 학부생이었던 루돌프 카르나프 정도만 프레게를 이해했다. 이들에겐 진흙 속의 진주를 알아볼 학식과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프레게의 연구가 재평가가 되고 제대로 빛을 보게 된 건 그의 사후의 일이며, 기존 철학과 새로 창시된 학문 모두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평생 수를 사랑했지만 학자로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프레게는 1925년 77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에겐 알프레트라고 하는 양자가 있었는데, 그에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사랑하는 알프레트, 내가 쓴 것들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비록 이것들 전부가 황금인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는 황금이 들어 있다. 나는 언젠가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이 평가될 것들이 여기에 들어 있다고 믿는다.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도록 주의해라. 이것이 내가 너에게 물려주는 거의 모든 것이다. 너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이 지나간 후에 비록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사랑에 전부를 건 사람은 사랑한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사랑함으로 한없이 농밀할 수 있었던 시간과 충만한 기억이 여전히 남기 때문이다. 사랑을 후회하는 건 전부를 걸지 않은 쪽이다. 비록 빈손으로 눈을 감았지만,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프레게는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과 성을 넘치도록 다했으니까. 후회했다면 알프레트에게 저런 유언은 남기진 못했을 것이다. 아마 자신의 저작과 기록을 다 불태우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빛을 볼 자신이 낳은 황금을 가슴에 안고 기쁜 마음으로 영면에 들었을 프레게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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