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철학자들은 보편자의 문제로 싸웠다. 한쪽은 보편자가 있으며 보편자는 존재하는 모든 존재와 사물에 앞선다고 했다. 이 입장을 실재론이라 하는데 유물론적 실재론은 아니고 관념이 존재한다는 개념적 실재론이었다. 다른 한쪽은 좋다, 보편자 인정하겠다. 하지만 보편자보다는 개개의 존재, 즉 개별자가 보편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후자의 입장을 온건 실재론이라 한다. 기독교 중심으로 돌아가던 중세의 세계관에서 보편논쟁은 단순한 말싸움이 아니라 민감한 정치문제였다. 친 기독교 기득권 세력은 실재론을 옹호했고, 로마 교회의 권력 독점을 탐탁치 않아 했던 지방 교회들과 종교 중립적인 철학자와 과학자 들은 온건 실재론을 지지했다. 그런데 여기에 제 삼의 주장이 등장하는데, 바로 유명론이다. 유명론을 처음 제기한 이는 11세기 프랑스 철학자 로스켈리누스였다. 그는 "너네들 왜 있지도 않는 거 가지고 싸우냐, 신이니 이데아니 실체니 이런 거 환상이야. 그냥 성대를 통해 울려나오는 소리에 불과한 이름일 뿐이야"라고 주장했다.
15세기 들어 보편논쟁이 수그러들만 하니까 철학자들은 새로운 논쟁 거리를 만들어냈다. 심심할 틈이 없다. 이번의 주제는 합리론이냐 경험론이냐 였다. 이 논쟁은 사실 보편논쟁의 연장전이었다. 보편논쟁에서 신, 실체, 존재 등의 형이상학적인 관념이 실재함을 믿고 인간은 어떤 보편적인 관념을 타고난다고 믿었던 이들, 주로 유럽 대륙의 철학자들은 합리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태어날 때 백지상태이며 오로지 경험에 의해서만 지식과 도덕 관념들을 학습할 수 있다고 생각한 이들, 주로 영국 철학자들은 경험주의자가 되었다. 합리론과 경험론 모두 지식과 관념을 중시한다. 다만 지식의 근원과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론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한다. 합리론은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로 이어지고, 경험론은 로크로부터 버클리 흄으로 계승된다. 이 철학자들 중 데이비드 흄은 경험론을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갔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 그리고 역사가였다.
흄의 철학에서 중요시 되는 개념은 인상과 관념이다. 인상은 관찰자가 어떤 물질을 바라볼 때 '복사원리'에 의해 관찰자의 감각체계를 통해 수집되는 경험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머릿 속에 남은 물질에 대한 기억이 바로 관념이다. 이처럼 인간은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만 지식과 관념을 습득할 수 있다는 것이 흄의 주장이었다. 흄은 언어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한다. 명제는 크게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로 나뉘는데, 분석명제는 관념들로 구성된 문장으로 "신랑은 남자다"처럼 정의상 참이며 부정하면 모순이 되는 동어반복형 문장이다. 한편 종합명제는 "철수는 신랑이다"처럼 우연히 참이 되며 결혼 소식을 듣거나 하는 경험으로만 알 수 있는 명제이다. 두 명제 중 흄은 경험을 통해 알 수 있는 명제만이 참이라고 주장했다. 경험하지 않은 명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오직 경험으로 얻은 관념만을 참된 지식으로 여기는 강한 경험론자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극단적 경험론자였던 흄은 당연히 합리론을 비판했다.
"합리론 옹호자들, 혹은 형이상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실체'니 '힘'이니 '자아'하니 것들을 그 말에 상응하는 어떤 관념이 있는 것마냥 이야기한다. 그런데 복사 원리에 따르면 그런 관념 또한 우리가 경험한 어떤 인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어야만 한다. 헌데 그 인상이 대체 무엇인가? 예를 들어 '사과'라는 말에 해당하는 관념의 뿌리를 곰곰히 따지다보면 사과를 먹다 본 빨강색, 과육의 질감, 맛 등에 관한 인상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런데 사과의 '실체'는? '자아'는?"
흄에 따르면 실체나 자아 등 형이상학적인 용어에 대응하는 인상은 없다. 신도 마찬가지다. 신도 마찬가지다. 신을 부정하면 신성모독죄로 처형까지 당할 수 있는 당시 분위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직접 경험하지 않은 신을 흄은 믿지 않았다. 급진적인 사상가였던 것이다.
흄은 많은 책을 쓰는 철학자들과 달리 세 권의 책만 남겼다. 급진적인 사상 때문인지 그의 생전에는 많이 읽히지 않았다. 그러한 흄의 철학은 그의 사후에 재평가 되며 근대철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칸트와 더불와 수많은 근대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현재까지도 끊임없이 인용되는 철학의 거장이다. 독일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헤겔의 저작 전체보다 데이비드 흄이 쓴 한 페이지에서 더 배울 게 많다."고 평했고, 영국 철학자 제러미 밴담은 "흄을 읽고 눈에서 비늘이 떨어졌다." 흄을 치켜세웠으며, 칸트는 "흄을 읽고 비로소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극찬했다.
'지식창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자습] 수를 사랑한 천재 수학자 프레게 (0) | 2020.03.31 |
---|---|
[철학자습] 이것은 오리인가 토끼인가, 관찰의 이론의존성 / 노우드 러셀 핸슨 (0) | 2020.03.30 |
[철학자습] <군주론>은 있지만 군주는 없다 /(feat. 마키아벨리) (0) | 2020.03.28 |
[철학자습]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조지 버클리 (0) | 2020.03.27 |
[철학자습] 라플라스의 악마는 없다 (0) | 2020.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