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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창고

[철학자습]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 조지 버클리

조지 버클리

근대 철학의 화두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이었다. 두 이론은 모두 우주의 근원과 지식의 원천을 묻는 질문에서 나온 방법론이다. 합리론은 이성을 통해 지식을 구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담긴 이론인 반면 경험론은 감각 체계를 통한 경험으로 지식을 구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근세의 합리론은 데카르트에서 시작되어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로, 경험론은 로크에서 출발해 버클리 흄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두 이론은 제가끔 확장되고 발전하다 칸트에서 합쳐지고 다시 헤겔로 이어진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철학자들 중 버클리는 로크의 경험론을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철학으로 승화한 인물이다.

 

조지 버클리는 1685년 3월 12일 아일랜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성공회 주교가 된 인물이다. 버클리는 로크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철학사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존재론적 관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물질만이 존재한다는 유물론, 정신만이 존재한다는 관념론, 물질과 정신 모두 존재한다는 이원론이 그것이다. 존재론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관점에 따라 물질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실재론과 관념만을 인정하는 관념론의 실재론으로 나뉜다. 로크는 물질의 성질을 물질 고유 성질(1차 성질)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관념(2차 성질)으로 구별하여, 관념도 인정하면서 물질이 객관적 실재라고 주장하는 인식론적 실재론자였다.

 

버클리는 로크의 경험론을 따르면서도 그가 취하는 실재론과 관념론 사이의 모호한 위치를 비판하며 자신의 사상을 구축했다. 버클리는 물질이 실재하며 물질의 고유 특성인 1차 성질은 객관적이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2차 성질은 객관적이이라는 로크의 주장에 반했다. 버클리에 따르면 물질의 고유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모양 크게 무게 등의 1차 성질 또한 물질과 그것을 지각하는 주체의 관계나 해석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물질의 모든 성질은 주관적이라는 것이 버클리의 입장이었다. 이와 같은 버클리의 주장은 모든 성질은 물질 고유의 것이 아니라 주체의 의식에 떠오른 관념일 뿐이라는 극단적인 인식론적 관념론에 도달한다.

 

버클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사상에 오컴의 면도날 이론을 적용한다. 면도날 이론은 "불필요한 가정을 불이지 마라"로 요약된다. 버클리는 이 오컴의 면도날로 의식 바깥에 존재하는 현상과 사물의 실재 가능성 자체를 제거한다. 모든 존재는 의식에 나타난 관념일 뿐이라는 강한 주장이다.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는 버클리의 명제의 바탕에 그의 주관적 관념론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의 명제를 뒤집으면 지각되지 않는 것은 부재가 된다. 이에 다른 학자들은 의문을 제기한다. 가령, 산 하나를 두고 윗동네와 아랫동네가 있다고 하자. 아랫동네에 사는 '나'는 우리 동네를 지각하지만 윗동네는 그럴 수 없다. 그렇지만 윗동네는 분명히 존재하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내가 지각할 수 없다는 이유로 윗동네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버클리는 아주 간단한 대답을 내놓는다. "신이 그것을 지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지각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은 존재한다." 성공회 주교다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주장은 문제적이다. 그의 유신론과 관념론이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을 다시 펼치면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주와 사물이 존재하고 인간은 그것을 지각해 관념으로 받아들인다. 즉 신의 존재를 긍정함으로써 물질의 실재를 인정하는 유신론적 유물론이 자신의 주관적 관념론을 반박하는 것이다. 신이 있어 존재하는 물질도 인간을 사랑한 신이 장인의 정신으로 세공해 놓은 관념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인간이 뭐라고 그렇게 할까. 아무래도 정곡을 찔린 질문에 당황한 나머지 궁색한 답변을 내놓은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