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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습] 스피노자, 우상을 넘어서

샨티류 2020. 3. 25. 22:00

스피노자 초상화

16세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종족의 우상, 동굴의 우상,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 등 네 개의 우상을 언급하며 이 우상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족의 우상은 출생과 동시에 부여받는 인종이나 국적 종교와 같은 배경에서 만들어지는 고정관념이고, 동굴의 우상은 의식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관념의 동굴에서 외부를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존재가 사람임을 비유한다. 시장의 우상은 어떤 개념이나 관념을 주입받을 때, 그것이 실재인지 여부와 무관하게 실재라고 믿어버리는 오류에 대한 지적이고, 극장의 우상은 전통이나 권위에 순종하거나 맹목적으로 믿는 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은 성장하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배운다. 그렇게 제 안에 쌓인 지식을 진실, 혹은 전부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의학의 아버지라 평가 받는 히포크라테스가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말했듯, 세상 전부를 알기에 한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 짧다. 그렇게 존재의 앎은 세상의 극히 일부이며 그마저도 주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앎만이 진실이 아니고 전부가 아닐 수도 있는 가능성을 쉽게 간과하곤 한다. 자신만이 옳다고 믿으며 타인을 가르치려 드는 고지식한 사람(소위 꼰대)을 우리는 주변에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베이컨이 언급한 네 우상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런 줄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우상 들에 깊이 빠져 있는 이들을 극단주의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이컨으로부터 무려 5세기가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도 우리는 일상에서 숱한 극단주의와 마주친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는 인종 차별과 혐오가 계속되고 있으며, 우리나라만 해도 계층 지역 성별 간 갈등은 물론 양 극단에 치우친 정치 세력의 자극적인 언행을 보고 싶지 않아도 자주 보고 듣게 된다. 이는 자유민주주의가 보장된 체제 안에서조차 고정관념과 선입관, 그리고 편견 등에서 벗어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치·문화·사회·종교 모든 면에서 지금보다 더욱 경직됐었던 17세기, 베이컨이 언급한 우상을 뛰어넘은 문제적 인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뤼흐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유대인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독실한 포르투갈계 유대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유대인 공동체에서 자랐다. 영민하고 유대교 교리와 문화에 해박한 그에게 유대 사회는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그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성경을 공부할수록 의문이 커졌으나 아무도 속시원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다 라틴어를 배우고 고대 그리스 철학과 아랍 철학을 접하면서 유대교의에 한계를 느꼈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깨달은 유대교리의 한계를 자유롭게 발설하고 다녔다. 그런 스피노자를 유대 사회가 좋게 볼 리 만무했다. 스피노자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바를 쉽게 굽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로들이 수시로 그를 설득하고 회유했으나 스피노자는 합리적 비판을 멈추지 않았고 끝내 유대 교회는 부계사회 비판과 신성모독죄로 스피노자를 종교 재판에 회부했다.

 

"천사들의 결의와 성인의 판결에 따라 스피노자를 저주하고 제명하여 영원히 추방한다. 잠잘 때나 깨어 있을 때나 저주 받으라. 집을 나갈 때도 들어올 때도 저주 받으라. 주께서는 그를 용서하지 마시옵고, 분노의 화염으로 그를 불태우소서. 누구도 입으로 그와 말을 나누지 말 것이며, 돌보지도 말 것이며, 누구도 그의 4에르헨(2m) 근처에 가지 말 것이다. 누구도 그가 구술했거나 저술한 문서를 읽지 말 것이다."는 판결을 받고 스피노자는 유대사회에서 제명되고 영구 추방된다. 이를 두고 강신주는 고인 물 같은 유대 사회에 염증을 느낀 스피노자가 추방을 자초했다고 주석한다. 강신주의 주석대로라면 스피노자는 자발적으로 종족의 우상을 뛰어넘은 것이다. 강물에서 태어난 연어가 굽이 굽이 물길을 따라 마침내 바다에 닿듯, 스피노자는 좁은 유대 사회를 벗어나 너른 세상으로 나아간 것이다. 스피노자가 스물일곱 되던 해의 일이었다.

 

유대 사회로부터는 독립했으나 경제적 자립은 쉽지 않았던 스피노자는 당대 첨단 기술이자 선망 직업이었던 렌즈 제조 기술을 배워 이를 해결했다. 당시 렌즈 가공은 목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바란 건 부가 아니었다. 그는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정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을 학문에 쏟았다. 그즈음 스피노자를 사로잡은 건 한 세대 전 철학자였던 데카르트였다. 추방되던 해에 쓴 <지성 개선론>과 그로부터 삼 년 후에 출판한 <데카르트 철학의 여러 원리>는 데카르트를 향한 스피노자의 애정과 관심을 보여준다. 스피노자가 데카르트 사상에 물든 건 당연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과 연역적 방법론, 수학·기하학적 논증을 강조한 근세 합리론의 아버지였으며, 유럽 전역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사상가였다. 그를 흠모한 스웨덴 여왕은 데카르트를 자신의 개인 철학 선생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유대 사회를 벗어났듯이, 데카르트의 권위와 사상에 머무르지만은 않았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합리적 방법론을 받아들이면서도 데카르트의 사상에서 오류를 발견하고 문제를 제기했으며, 데카르트 철학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했다. 결과론적으로 베이컨이 언급한 '시장의 우상'과 '극장의 우상'의 극복을 시도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심신이원론을 주장하면서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않는 의미를 지닌 실체를 무한실체와 유한실체로 구별하고 무한실체를 신, 유한실체를 물질과 정신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정신과 물질이 만나는 곳으로 두뇌의 송과선이라는 기관을 제시한다. 하지만 너무 많은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과 정신과 물질이 만난다는 송과선 또한 물질이라는 점에서 데카르트의 이론은 한계에 봉착한다. 이에 스피노자는 자신의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해나간다. 그는 실체는 단 하나만 존재하며 그건 자연이라는 무신론적 일원론을 주장했다. 스피노자는 자연을 신으로 불렀지만, 종교적 의미의 인격적 신과는 거리가 멀었다. 스피노자에게 신과 신성은 자연 속 도처에 산재하는 무엇이었다. 이러한 입장을 '범신론'이라 한다. 그리고 데카르트가 유한실체로 분류했던 물질과 정신은 하나의 실체가 드러나는 다른 방식, 즉 '속성'으로 분류하고 물질과 정신이 지각되는 형상을 '양태'로 정의했다. 이로써 스피노자는 데카르트 심신이원론의 한계, 너무 많은 실체가 존재한다는 것과, 정신과 물질이 송과선에서 만난다는 문제를 극복했다.

 

스피노자가 파문을 자초했다는 의견이 있지만, 익숙한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척당한 채로 이십 년 가까이 지독한 고독 속에서 지내는 건 누구에게라도 어렵고 힘들며 두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고독과 고통에 매몰되지 않았다. 삶이 고통스러울수록 더욱 철학에 정진했다. 이십대 후반에 저술한 <지성 개선론>에서 스피노자는 이렇게 적었다. "경험이 나에게 사회생활에서 생기는 모든 일이 헛되고 무용함을 깨닫게 한 뒤에 -내가 두려워했던 모든 일이, 그것이 내 마음에 감동을 일으킨다는 뜻으로밖에는, 그 자체로는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 뒤에 -나는 마침내 다음 문제를 탐구하기로 했다. 즉 정말 값지고 그 가치를 나에게 나누워줄 수 있으며, 오직 그것만이(다른 온갖 것들이 배척된 뒤에)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걸 발견하고 획득함으로써 내가 지속적이고 완전한 행복을 누리게 될 그런 무엇이 정말 있는가를" 그가 낳고 자란 사회로부터 철저히 매장되었으면서도 행복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다. 이를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 철학이었으며 그 결과물이 그의 역작 <에티카>일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자신이 깨우친 행복론을 타인에게 주입하려 들거나 강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도 그건 자신의 사상 또한 '동굴의 우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자각 때문은 아니었을까.